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엑토르 베를리오즈 (문단 편집) === 초기 === 1803년 프랑스 [[리옹]] 근교의 라 코트 생 앙드레(La côte-St-André)에서 의사인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이 때는 음악에 큰 흥미가 없었는지 [[플루트]]나 [[기타]]만 조금 만졌을 뿐 악기를 제대로 배운 경험이 없었다. 심지어는 '''[[피아노]]'''마저.[* 작곡자에게 피아노는 거의 의무교육 대상 악기이다. 어떤 곡을 작곡하건 일단 피아노로 스케치를 해보는 것은 작곡의 가장 중요한 기초이다. 현재에도 웬만한 대학 작곡과 입학 시험에는 무조건 피아노 실기 시험이 있다. 하지만 베를리오즈는 평생 피아노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의사가 되길 권하던 부모의 뜻으로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17세의 나이로 [[파리(프랑스)|파리]]의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의학에는 흥미가 없었고, 오히려 18살 때 병원의 열악한 위생환경을 보고 구토를 하고 의학에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일기에도 기록이 남아있는데, 죽은 환자를 대충 둔 영안실에[* 물론 당시에는 [[냉장고]]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라 시신이 부패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쥐들이 들끓어 죽은 환자를 갉아먹고 있었고 온갖 토사물과 쥐의 배설물이 병원 곳곳에 대충 치워진 채로 있었다. 이게 당시 파리 내의 대형 병원의 모습이었다.[* 파리 뿐 아니라 당시 유럽이나 세계 많은 나라들 병원들이 이랬다. 덕분에 귀족들은 병원에 가느니 그냥 의사를 집으로 데려와 왕진받고 수술받게 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세균이나 위생에 대하여 몰랐던 시절이었기에 병원 말고도 식당 주방이나 푸줏간도 비슷했다. 참고로 그 광경에 충격을 먹은 베를리오즈는 창문을 뛰어넘어 집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 이후 베를리오즈는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오페라에 매력을 느껴 작곡가가 되고자 진로를 바꾸게 된다. 이후 양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1826년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했으나, 보수적인 교수들과 마찰을 빚었다고 한다. 이때 파리 음악원 학생에게 주는 '로마 대상'[* 수상자에게 3년간 국비로 로마의 빌라 메디치에서 공부할 수 있는 혜택을 주는 제도이다. 이 상을 받은 작곡가들로는 드뷔시, 비제 등이 있으며, [[카미유 생상스]], [[모리스 라벨]] 등의 작곡가들 역시 탈락할 정도였다.]을 타기 위해 칸타타 작곡에 도전했다. 음악원 첫해인 1826년에는 사전심사에서 탈락, 1827년에는 칸타타 "오르페우스의 죽음", 1828년에는 "에르미니", 1829년에는 "클레오파트라"를 제출했으나 모두 탈락했다. 그리고 1830년 4번째 도전에서 칸타타 '사르다나팔의 죽음'으로 드디어 로마 대상 수상에 성공한다. 1830년 당시 프랑스는 [[7월 혁명]]이 한창이었는데, 베를리오즈는 작곡을 마친 직후 총을 들고 혁명에 참여했다고 한다. || [[파일:harriet smithson.jpg|width=150]] || || 오필리아로 분장한 해리엇 스미드슨 || 한편 1827년 가을 파리에서는 영국에서 온 연극단이 큰 화제가 되었는데, 이들의 [[햄릿]] 공연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햄릿의 성공에 고무된 연극단은 이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해서 다시 큰 성공을 거둔다. 베를리오즈 역시 유행을 따라 햄릿 공연을 보다가 오필리아 역할을 맡은 여배우 해리엇 스미드슨을 보고 [[짝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이 짝사랑은 정도가 심해져서 한동안 거의 상사병 수준에 달했는데, 그는 해리엇이 머무르는 아파트 근처에 숙소를 잡고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았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스토킹을 한 셈인데, 다행히 더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베를리오즈는 해리엇에게 틈틈이 연서(戀書)를 보내고 1828년 자신의 연주회를 개최하면서 해리엇 스미드슨에게 초대장을 보내기도 했지만 당시 인기 절정의 여배우는 세 살 어린 무명의 음악학도 따위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베를리오즈는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828년부터 그의 대표작인 '''환상교향곡''' 작곡을 시작했다. 이 곡은 5악장으로 구성되었고 각 악장마다 제목이 붙어있는데, 1악장 '꿈,정열', 2악장 '무도회', 3악장 '전원의 풍경', 그리고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 5악장 '마녀들의 밤의 꿈'이다. 4악장부터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무시무시한 제목이 붙은 이유는 3악장까지 잘 쓰다가 해리엇이 다른 남자에게 갔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홧김에 4, 5악장을 작곡하여 완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해리엇은 1829년 3월경 연극단을 따라 파리를 떠났고 이후 한참동안 베를리오즈를 만날 일이 없었다. 환상교향곡을 완성한 후 해리엇에 대한 연정을 간신히 억누른 베를리오즈는 이어 마리 모크라는 젊은 피아니스트와 사귀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베를리오즈는 로마대상을 타게 됐는데 마리 모크와의 연애때문에 그토록 고대했던 로마 유학을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국의 강압에 못이겨 결국은 로마로 떠났는데, 로마로 떠나기 전 베를리오즈는 마리와 약혼까지 하면서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마리는 우려했던 대로 베를리오즈가 로마에 있는 동안 변심해서 약혼을 깨고 돈 많은 피아노 제조업자 가문인 플레옐 집안의[* 쇼팽이 애호했던 것으로 유명한 플레옐 피아노를 만든 집안이다.] 아들과 카미유 플레옐과 결혼해 버린다.[* 참고로 이 마리 모크 플레옐이 바로 리스트가 쇼팽의 집에서 몰래 관계를 가졌던 그 플레옐 부인이다. [[프란츠 리스트]] 항목 참고. ][* 마리 플레옐은 리스트 외에도 여러 사람과 염문을 뿌렸고 결국 카미유 플례옐과 몇년만에 이혼한 후 자유부인(?)으로 살았다.] || [[파일:Marie-Moke-Pleyel.jpg|width=150]] || || 마리 모크(플레이엘), 1830년경 || 격정의 사나이 베를리오즈는 이 소식을 접하고 자살 소동을 일으켰다가 주변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했고 "파리로 가서 두 악녀(마리와 그 모친)와 무고한 한 남자(플레이엘)를 죽여버리겠다"면서 실제로 택도 없는 살인 계획까지 세워서 파리로 향했다.[* 베를리오즈는 마리 모친이 마리를 부추겨서 자신과의 약혼을 깨고 돈많은 남자와 결혼시켰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편지로 마리 모크의 결혼소식을 알린 것도 그녀의 모친이었다. 그래서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 다행히 도중에 포기하고 로마로 돌아온 베를리오즈는 환상교향곡의 연작에 해당되는 "렐리오 : 삶으로의 복귀('Lélio ou Le retour à la vie)"라는 작품을 쓰면서 마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환상교향곡이 순수한 관현악 작품인 반면 렐리오는 4부 독창(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과 합창이 포함된 일종의 칸타타로 모노드라마(1인극)가 가미돼서 세미 오페라식으로 연주된다.[* 보통 환상교향곡을 사랑과 실연의 연작 1부, 렐리오를 2부로 놓는데 렐리오는 환상교향곡보다 인지도가 약한데다가 훨씬 대규모의 연주단이 필요한 탓에 자주 연주되지는 않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wKbDSeFZnLE|렐리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